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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오 아기날도

Views : 5,065 2014-10-17 22:33
필리핀 정보 공유 126999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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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오 아기날도  

2014-10-17 22_18_02-에밀리오 아기날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png

(Emilio Aguinaldo, 1869년 3월 23일 ~ 1964년 2월 6일)는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며 필리핀의 제1대 대통령이다. 처음엔 스페인, 뒤에는 미국에 대항해 싸웠다. 1898년 6월 12일 카비떼에서 필리핀 독립선언을 하였다. 카비테에서 독립을 선언한 필리핀은 말로로스에 임시 수도를 설치하고 아시아 최초의 공화주의적 헌법제정을 위한 혁명의회를 소집하였다. 필리핀의 국부(國父)의 한 사람이자 필리핀 건국의 영웅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호세 리잘 등의 영향을 받아 스페인에 저항한 민족 해방 운동에 동참하였다. 1896년 카비테 시장이 되고, 당시 스페인에 대항하여 격렬한 투쟁을 벌이던 혁명조직 카티푸난의 지역 책임자였다. 1897년 필리핀을 지배해 온 스페인에 맞서 독립 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홍콩에 망명하였다. 이듬해 미국과 스페인간에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의 원조를 받아 다시 독립 전쟁을 지휘하였다. 1899년 필리핀 혁명 정부를 조직하여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이 필리핀을 지배하게 되자 체포되었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다시 독립 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1901년 미국과 대항해 전쟁을 하다 패하고 정계에서 은퇴, 1935년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였으나 패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의 반미 심리전에 가담하여 일시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후일 필리핀 화폐 5페소 지페의 주인공으로 도완되었다.

에밀리오는 1869년 3월 23일 스페인령 필리핀 루손 섬의 카비테 시(市)에서 칼로스 아기날도와 트리니다드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던 1869년 3월 26일 당시는 성 금요일이었으며 카윗 마을은 매우 조용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 트리니다드는 3일 째 계속되는 진통으로 인해 매우 심각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아이에 대한 기대감이 희박해지면서 아버지 칼로스는 폭죽을 터트리기로 결정했다. 급작스런 폭발음으로 놀란 트리니다드는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낳게 되었다.

필리핀인과 중국인, 타갈로그인의 피가 섞인 혼혈인이었으나 아기날도의 집안은 필리핀 카비테 주(州)의 명문가의 후예였다. 그가 3세가 되었을 때 홍역을 치른 직후 1872년 카비테 지역에 반스페인 폭동으로 혼란한 상황이 닥쳤다. 갑작스러운 소요사태에 당황한 친척들은 그를 작은 나무 아래 방치해놓은 채 피신했다. 후에 에밀리오를 찾았을 때는 개미에 물려 온몸이 부어 올랐으며 너무 울어서 목소리도 완전히 쉰 상태였다. 야생 늑대와 호랑이, 들개 등이 다녔는데도 방치된 상태에서 그는 극적으로 생존해 있었다. 그는 홍역이 재발하여 빈사지경에 처하기도 했다. 그는 후일 마닐라의 성 토마스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의 어머니는 현명하고 사려가 깊었다. 어머니 트리니다드는 그에게 직접 글을 쓰고 읽는 방법 등을 가르쳤다. 그녀는 또한 그에게 여러가지 전설과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으며 당시 유명했던 나방과 호롱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방과 호롱불 이야기는 필리핀의 오래된 전설이었다. 후일 호세 리잘은 이 이야기를 통해 불꽃이 아름다운 것이며 이를 위해 죽는 것이 매우 영예로운 것이라 생각했던 반면,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밝은 불빛은 매우 위험한 것이며 무모하게 불 속으로 날아가는 어리석은 나방들에게 경고를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1878년 아버지 칼로스가 사망한 후 그는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기 위해 노동과 잡역부로 활동했다. 나중에 그는 어머니를 도와 작은 농장을 일구었으며, 부지런히 돈을 모아 작은 공장을 경영했다. 나중에 그는 작은 배 한 척을 구입하여 민도로와 비사야 지역으로 소금과 볼로 등을 운반하는 운송업을 하였으며 카비테로 등나무, 왁스, 섬유, 탠 껍질 등의 상품들을 운반했다. 그는 또한 마닐라로 가축, 물소 등을 판매하러 다니기도 했다. 성인이 되자 그가 스페인 군인에 강제 징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어머니 트리니다드는 에밀리오를 마을의 세금징수 등을 하는 마을 공무원 자리를 찾아서 그에게 주선해주었다. 후에 그는 카윗 지방관으로 승진했다.

마닐라의 성 토머스대학을 졸업하였다. 그는 당시 출판과 배포가 금지되어 있던 금서인 호세 리잘의 저서 '놀리 미 탕게레'를 구하였으며 누구를 막론하고 이 책을 소유하거나 읽는 사람은 발견될 경우 체포되었으나 태연히 이 책을 집에 보관하여 두고 친구들과 돌려보기도 했다. 그는 마소닉 조직에 가담하였으며 콜롬버스를 상징하는 콜론이란 가명을 필명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1894년 필리핀 총독부의 지방관으로 근무하였음에도 카티푸난(Katipunan)에 가담하였다. 그는 막달로라는 이름을 혁명 암호 정하여 카윗의 수호성인을 기렸다. 그는 여러 카비테 시민들 중 신뢰가 가는 인물을 규합하여, 비밀조직 카티푸난에 가담시키기도 했다.

1895년 8월 카비테 시장으로 출마하여 당선, 그해 8월 카비테 시장에 선출되었으며 동시에 안드레스 보니파시오가 조직한 비밀결사 카티푸난에의 지도자로서 활약하면서, 1896년8월 혁명이 발발하자 선봉에서 싸워 승리를 거두어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의 신뢰를 얻었다. 그는 곧 스페인에 대항하여 격렬한 투쟁을 벌이던 혁명조직 카티푸난의 지역 책임자가 되었다.

1896년 카티푸난 카비테 지역조직이 발각되었을 때 그는 그의 지역사람들 중 비밀조직에 함께 가담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의심의 눈을 피하기 위해 오히려 스페인 정부에 충실히 봉사하였다. 그는 필리핀 총독부의 관리 및 유력 정치가의 집을 방문하여 지역의 안전을 위해 100명 가량의 스페인 군인들이 필요하다고 요청했다. 그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스페인 군인들이 마닐라에 집결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카티푸난의 연락원으로부터 총독부군의 마닐라 집결 사실을 확인한 즉시 카윗으로 돌아와 산하의 조직원들을 지휘하여 법정을 침략하였으며 카윗 지역을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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