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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드 마르코스

Views : 3,949 2014-10-15 21:10
필리핀 정보 공유 1269984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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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드 에마누엘 에드랄린 마르코스(스페인어: Ferdinand Emmanuel Edralin Marcos, 1917년 9월 11일 ~ 1989년 9월 28일)는 필리핀의 법률가이자 독립운동가, 정치가로, 필리핀의 제10대 대통령이자 11대 상원 의장, 3번째 총리였다.

1965년 대통령이 된 뒤 21년간 장기집권하면서 1972년 계엄령을 공포하여 정적과 언론인을 투옥하는 등 독재체제를 구축하였다. 통상 약칭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로 부른다.

대학 재학 중 1933년 정치가인 아버지의 정적을 살해했다가 체포되어 1939년 11월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대법원에 상소하여 1년 뒤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 뒤 마닐라에서 법정 전문 변호사로 개업하고 제2차 세계 대전 때에는 장교로 항일 전쟁에 참전했다. 한때 필리핀 바탄에서 일본군 포로가 되었으나 탈출에 성공, 항일 게릴라 지도자로 활동했다.

필리핀의 하원 의원과 상원 의원을 거쳐 1965년에 필리핀 자유당의 대통령 후보자로 내정되었다가 밀려나자 상원 의장직을 차지했음에도 탈당, 필리핀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긴 뒤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72년 9월 계엄령을 선포하여 정당활동을 금지하고 정적과 언론인을 투옥하였다. 대통령 집권 초기에는 경제 개혁을 추진하고 공산주의 체제 하의 국가들과도 외교를 맺었고, 높은 지지율을 얻어 1969년에도 재선되었지만, 경제 사정 악화와 개혁 실패 등에 부딪혀 독재 정치를 하기 시작했고 부패를 일삼았다. 1976년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의 권력을 강화하고 1981년 1월 계엄령을 해제, 정치범 일부를 석방했다.1983년 베니그노 아키노(Benigno Aquino) 암살 사건을 계기로 범인으로 몰리기 시작했고, 온갖 부정을 저질러 1986년 대선에서 코라손 아키노를 낙선시키고 재선에 성공했으나 반정부 시위의 여파로 그해 2월 자진 사퇴하였다.

하와이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사망했다. 부인인 이멜다는 그의 동반자였고, 자신의 재임 기간 동안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2014-10-15 20_43_04-페르디난드 마르코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png

출생과 유년 시절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1917년 9월 11일 루손에 있는 사라트의 한 마을(마닐라에서 태어났다는 얘기도 있음)에서 마리아노 마르코스(페르디난드 추아라는 얘기가 있으나, 추아는 그의 대부의 이름이다)와 호세파 에드랄린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로코스 사람인 그는 중국계와 일본계 그리고 필리핀 원주민의 혼혈인이다. 마르코스는 그의 조상이 "15세기의 중국 해적"이라고 말했다.

어린 시절, 마르코스는 부족함 없이 풍족하게 살았다. 그는 학교에서도 뛰어난 학생이었고, 권투와 사격에서도 뛰어난 편이었다.

학창 시절과 변호사 개업

마르코스는 마닐라에 있는 학교를 다녔다. 그의 교육은, 대부인 페르디난드 추아가 뒷받침을 해 주기도 했다. 비록 어린 시절 교육은 마닐라에서 받았으나, 대학 교육은 마닐라 밖에서 받았다. 1930년대 후반 마닐라 시 근교에 있는 필리핀대학교에 진학해 법률을 전공했다. 그 무렵 아버지가 내셔널 어셈블리를 운영하곤 했으나, 국회의원인 훌리오 날룬다산에 의해 실패하고 만다. 한편 1933년 마르코스는 아버지의 정적인 날룬다산의 암살에 가담, 날룬다산의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스스로 무죄를 증명하여 석방된다. 1939년 11월 유죄 판결을 받고 투옥되었으나 필리핀 대법원에 상소하여 1년 뒤에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그 뒤 마닐라에서 법정 전문 변호사가 되어 개업하였다.

그러던 중 1940년대에 접어들어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된다. 이 무렵 마르코스는 정치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때마침 제국주의 체제의 하나였던 일본이 필리핀을 점령하게 되고, 마르코스는 군대에 입대하게 된다. 그 와중에 항일투쟁에 참가했으나,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히고 만다. 다행히도 그는 바탄으로부터 중부 루손 섬에 이르는 '죽음의 행진'에서 살아 남아 기적적으로 탈출에 성공하고, 탈출 후 게릴라군 지도자가 되었다.

1954년 마르코스는 미인대회 우승자이기도 했던 이멜다 로무알데스(뒷날 남편 성을 따라가서 이멜다 마르코스로 개명)와 결혼하여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딸 이멜다 마르코스 2세, 마리아 마르코스, 아들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훗날 대통령 보좌관을 맡게 되는 사람), 딸 아이메 마르코스, 이레네 마르코스이다. 부인인 이멜다는 마르코스의 동반자이기도 했다. 부인 이멜다는 훗날 1972년의 계엄령 선포 이후 그의 정권에서 실질적인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녀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정부와 산업체의 요직에 친척들을 들어앉힘으로써 자주 비난을 샀고, 그녀 자신도 1975년 수도 마닐라 시장(1975년~1986년)이 된 이후 1979년에는 주택환경부 장관직을 겸임했다.


2014-10-15 20_59_37-File_Irm.jpg - Wikimedia Commons.png부인 이멜다 마르코스

재선과 국내 갈등

그러나 두 번째 임기에서는 첫 번째 임기에서 의욕적으로 시행했던 정책들의 효과가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경제 사정이 악화되는 등 필리핀의 국가 이미지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게 된 것이다. 거기다가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던 공산당이 부활하고, 한편으로 이슬람 세력들이 필리핀으로부터 분리의 조짐을 보이게 된다.

그는 공산주의자와 파괴분자들이 국가적 위기상황을 촉발시키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강력한 정부와 헌법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신속하게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야당 정치인들은 유언비어 유포와 선동, 선전 혐의로 투옥되었고 군부를 중용하여 체제의 기반으로 작용했다. 더욱이 공산주의 세력들과 학생 운동가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이에 분노한 나머지 1972년 성명서 번호 1081에 의한 계엄령을 선포한다.

2014-10-15 21_08_44-File_Marcos visit Johnson 1966.jpg - Wikimedia Commons.png백악관에서 존슨 대통령 부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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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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